히어로가 아닌 '인간'을 말하다
영화 베러맨은 제목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히어로물이나 성공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영화는 실패하고, 후회하고, 어긋나는 과정 속에서 진짜 변화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조심스럽고도 성찰적으로 그려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초능력도, 천재성도 지니지 않은 그저 평범한 40대 남성 ‘진우’다.
진우는 한때 잘 나가던 광고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력 단절, 가정불화, 인간관계 단절까지 겹친 ‘퇴물’의 상태다. 영화는 그의 나른한 일상에서 출발한다. 매일 같은 옷, 같은 표정,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더 이상 갈 곳 없는 생활이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거리에서 구두를 닦고 있는 한 노인과 마주친다. 그리고 그 노인이 “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라는 말을 건네며, 진우에게 아주 작은 변화를 던진다. 희망의 말은 모든 변화를 이끌게 되죠.
베러맨은 이 작은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변화’라는 주제를 끈질기게 따라간다. 주인공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현실적이다. 동료의 배신, 아들의 냉담한 시선, 아내의 무관심, 자기 계발서의 공허한 위로까지. 이 속에서 진우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지 주인공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관객 역시 이 물음 앞에 멈춰 서게 된다.
영화는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단편적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을 '용기 있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로 풀어낸다. 거창한 변화를 시도하는 대신, 진우는 자기 방을 치우고, 낯선 이에게 인사를 건네고, 묵혀둔 사과를 전하려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소한 행동들이 진짜 '변화'를 만들어낸다.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마음
베러맨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선함’이나 ‘도덕’에 대해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우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과거에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에 다시 눈길을 주고, 그 안에 남아 있던 상처와 실수를 마주하려고 노력한다. 이 영화가 말하는 ‘베러(Better)’는 윤리적 순도나 성과가 아니라, ‘이해’라는 감정에 뿌리를 둔다.
진우가 가장 먼저 변화를 시도한 대상은 자신의 아내다. 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도덕적 인내심이 아니라, "이해해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아내와의 대화는 자주 끊기고, 불편한 침묵이 오가며, 때로는 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장면들을 통해 '소통'이란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고된 작업인지를 보여준다. 이해해 보려는 노력은 쉽지 않아 끝까지 이행하려는 사람만이 성공자
또한 진우는 오래전 절연했던 친구와도 다시 연락을 시도한다. 예전엔 오해와 질투로 끊어졌던 관계. 이제는 그 이유조차 흐릿하지만, 그는 자신이 먼저 전화기를 든다.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그는 자신이 그때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를 깨닫는다. 베러맨은 용서를 받는 순간보다, 용서를 구하는 그 망설임의 순간을 더 중요하게 다룬다.
이 영화가 감동적인 지점은, 그 모든 변화가 결국 진우를 ‘새 사람’으로 바꾸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는 여전히 서툴고, 망설이고,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시도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영화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나를 다시 쓰는 법 – 우리 모두의 리셋 버튼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조용히 손을 내민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요?” 영화 속 진우처럼 거창한 결심은 필요 없다. 중요한 건 ‘다시 해보는 것’ 그 자체다. 영화 후반부, 진우는 다시 일터로 향한다. 이번에는 이전과 다르게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작고 소박한 프로젝트에 도전한다. 그 일이 성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는 스스로를 다시 정의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베러맨은 마치 인생의 리셋 버튼을 누르는 기분을 준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고, 실수는 있으며, 상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다시 시작해볼 수 있다’는 감정은, 오늘을 버티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진우는 실패한 가장이자 퇴물 광고인이었지만, 영화가 끝날 즈음 그는 그 모든 타이틀을 벗고, ‘자기 자신’으로 서 있다.
이 영화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 변화가 특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대단한 회사를 차리거나, 대상을 수상하지 않는다. 대신 아들에게 말한다. “아빠가 진짜 미안했어. 네가 뭘 느꼈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그 한마디는 긴 영화의 끝에 도달했을 때 가장 강한 메시지로 남는다.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뭔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그저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한 걸음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변화가 되는 순간. 베러맨은 바로 그 ‘충분함’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결론 – 더 나은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베러맨은 아주 조용한 영화다. 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매일 무심히 지나쳤던 수많은 감정과 태도들이 담겨 있다. 이 영화는 거창한 결심보다 작은 실천이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삶의 디테일을 통해 보여준다.
‘베러맨’은 슈퍼맨이나 아이언맨처럼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관계를 회복하고, 상처를 보듬고, 어제를 딛고 오늘을 살아간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이 시대의 진짜 히어로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건, 누구보다 뛰어나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이해하고, 한 발짝 더 다가서려는 마음. 베러맨은 그 마음의 가치를 믿는 영화다. 그리고 그 믿음이, 오늘 우리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더 깊게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