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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예언자, 한 인간의 성장, 폭력의 언어, 정체성

by 좋은내용 2025. 4. 9.

영화 예언자

한 인간의 성장인가, 시스템의 또 다른 복제인가

예언자는 단순한 교도소 드라마가 아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 사회라는 시스템 속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동시에 어떻게 타락하는지를 차분하고 날카롭게 그려낸다. 주인공 말리크 엘 제브르는 영화 초반, 무지하고 순응적인 젊은이로 등장한다. 무연고에 가까운 배경, 사회적 위치의 불안정성, 교육의 부재는 그를 감옥 안에서도 가장 낮은 계층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짜 힘은 그가 어떻게 ‘배워가며’ 자신만의 권력을 구축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감옥은 일반적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공간이지만, 예언자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말리크가 ‘세상 돌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는 학교이자 무대다. 그가 처음 저지르게 되는 살인은 타인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고, 그 후에도 그는 권력자에게 이용당하는 수동적인 존재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말리크는 생존법, 거래의 논리, 인간 심리의 약점을 흡수해 나가며 조금씩 다른 존재로 변해간다.

감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은 말리크의 내면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시험한다. 폭력과 협박, 지배와 굴복이 반복되는 그 안에서 그는 ‘배우고’, ‘관찰하고’, 마침내는 ‘주도’하게 된다.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관객은 말리크의 눈빛에서 처음의 두려움 대신 계산과 주도권을 읽게 된다. 그리고 문득, 이 변화는 진정한 성장이었는가, 아니면 또 다른 시스템의 모방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품게 된다.

폭력의 언어, 권력의 기술

예언자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감옥은 축소된 사회 그 자체다. 인종별로 나뉜 세계, 암묵적인 규칙, 감시자와 수감자 사이의 유착 관계 등은 우리 사회의 축소판처럼 그려진다. 이 공간에서 권력은 명분이 아닌 힘에서 비롯되며, 가장 유능한 자는 가장 잘 숨고, 가장 잘 속이며, 가장 효과적으로 타인을 조종하는 자다. 영화는 이런 냉정한 규칙들을 극적인 과장 없이, 지극히 사실적인 톤으로 묘사한다. 감옥에서도 서열이 있는 법이다.

말리크가 속하게 되는 코르시카계 마피아 파벌은 그에게 일종의 보호막이자 속박이다. 그들에게 그는 ‘무슬림’을 대표하는 도구이자 꼭두각시다. 그러나 말리크는 자신이 왜 필요했는지, 자신이 가진 정체성과 위치가 어떤 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를 빠르게 인지하고, 역으로 그 틈을 공략한다. 그는 점차 자신을 감시하던 자들을 감시하고, 그들을 통해 더 큰 외부 네트워크를 형성해간다.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폭력이 폭력을 낳는 구조 안에서 말리크가 그 폭력을 점점 ‘정치화’해간다는 것이다. 단순히 싸워 이기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누굴 살리고 누굴 버릴지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확장해 간다. 즉, 그는 ‘살인자’가 아니라 ‘정치가’로 진화한다. 말리크는 이 감옥에서 지배자가 되는 것뿐 아니라, 감옥 바깥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된다. 그의 손은 철창을 넘어 세상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예언자는 이처럼 인간이 어떻게 환경에 적응하며, 그 환경을 조종하게 되는지를 차근차근 쌓아 올린다. 결코 영웅적이지 않으며, 도덕적이지도 않은 이 변화는 오히려 현실적이기 때문에 더욱 섬뜩하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말리크가 되어버린 ‘괴물’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 괴물은 우리가 만든 시스템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그 괴물은 감옥이란 틀 안에서 만들어졌다. 

정체성, 언어, 그리고 예언이라는 은유

제목이 암시하듯 예언자는 종교적, 상징적 의미를 끌어들인다. 말리크는 예언자처럼 ‘꿈’을 꾸고, 예지몽을 경험하며, 때로는 죽은 자의 환영과도 대화한다. 이는 영화가 단순한 범죄 드라마를 넘어서, 말리크라는 인물을 일종의 ‘상징’으로 그리려는 시도임을 보여준다. 그는 한 민족이나 계층을 대표하는 구심점이 아니라, 경계에 선 자, 다수에게서 배제되었던 자, 그러나 그 누구보다 현명하게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인물이다.

말리크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혼란스럽다. 그는 프랑스 국적의 무슬림이고, 아랍어도 서툴다. 그는 유색인종이지만, 코르시카계 백인 마피아의 부하로 움직인다. 언어와 문화, 종교 사이에서 갈등하고 부유하는 그는 프랑스 사회 속 ‘비주류’ 혹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는 그 경계를 넘어서면서, 누구보다 빠르게 사회의 구조를 파악하고 재구성하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작은 세상 교도관 안이기 때문이다.

감옥 안에서 그가 배우는 언어는 프랑스어와 아랍어만이 아니다. 그는 ‘권력의 언어’, ‘협상의 언어’, ‘침묵의 언어’를 배운다. 말리크는 지배자가 되는 법을 책이 아니라 감각과 본능, 치밀한 계산으로 익힌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바로 영화가 말하는 ‘예언’ 일지도 모른다. 그가 예지 하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어떻게 인간은 또 다른 권력을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순환이다.

예언자는 끝내 어떤 구원의 메시지도 남기지 않는다. 말리크는 바뀌었지만, 그 변화는 우리가 기대했던 ‘성장’이나 ‘회복’이 아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지만,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제국의 시작일 뿐이다. 영화가 말하는 예언은 그저 예견된 파국, 예견된 반복일지도 모른다.

결론 – 괴물은 감옥이 아니라, 사회가 키운다

예언자는 단순한 감옥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잔혹한 교본이다. 말리크는 우리가 쉽게 연민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다면, 우리는 그가 단순히 ‘선택한’ 것이 아니라, ‘길러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사회가 만들어낸 구조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권력이 생겨나고, 그 권력이 또 다른 지배의 형태로 진화하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감옥은 단지 하나의 장소일 뿐이며, 그 바깥도 결국 비슷한 논리로 작동하는 세계라는 사실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예언자는 끝없이 반복되는 권력의 서사를 통해 묻는다.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는가, 아니면 그저 더 영리한 지배자를 만들어내는가? 영리하지 않은 최하위 계층에서 남아 있을 것인가? 그 질문이, 영화가 남긴 가장 묵직한 예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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